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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간 방대한 문헌과 사진자료를 토대로 자동차문화 전반에 관한 조사/연구/분석/저술/방송/강의를 통해 우리나라 자동차문화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 전영선소장의 자동차 이야기 코너입니다.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18대의 자동차 (11)

페이지 정보

글 : 전영선(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18-03-15 20:46:58

본문

◉ 1980년생 캐딜락 세빌 엘레강트 (1980 Cadillac Seville Elegant)-네오 클라식 모던니즘 스타일의 정수

 

1980-1985년 사이의 캐딜락 세빌은 독특한 스타일이었다. 모든것이 새로운 1980 대의 캐딜락 세빌은 세계에서 가장 별난 차였다. 그리고 가장 진보 된 이 자동차에 결합 된 고전미와 현대미는 네오 클래식 모던 스타일을 대표하는 걸작품이다. 이 차의 역동적인 쐐기 스타일, 전륜 구동, 전자식 차고제어 장치, 4륜 디스크 브레이크, 정교한 독립형 서스펜션은 이 차를 세계 최고 수준의 럭셔리 카로 만들어 주었다. 그것은 캐딜락 스타일의 강력한 정체성이었다. GM이 이 차를 산하 모든 부서에 복제하지 못하게 하여 캐딜락 세빌 독점권을 유지했다. 이런 스타일 독점권은 1980년대의 캐딜락 세빌을 유일한 디자인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1980년형 캐딜락 세 빌레 (Cadillac Seville)의 후부 스타일은 1950년대의 롤스 로이스 실버 레이즈는 말 할 것도 없고 같은 시기 영국의 다임러 리무진을 연상케 한다. 세빌의 이런 후부 디자인은 트렁크의 길이를 줄여 더 많은 실내 공간을 확보했다. 그러나 GM의 탐욕은 이 고상한 자동차의 인기를 추락 시켰다.

 

‘세빌은 디젤 엔진이 표준으로 장착 된 최초의 미국 자동차’라는 광고 때문이었다. 우아한 자동차에 시끄럽고 진동이 심하고 힘이 약한 디젤 엔진을 얹은 것이 이 차의 우아한 이미지를 완전히 망친 것이다. 수요자들은 석유 부국인 미국 차에 그런 엔진을 올리는 이유가 무 인가, 세빌은 휘발유 엔진이라야 살 수 있다는 불만을 만들어 낸 것이 큰 실수였다. 혹심한 세계적인 석유파동을 겪고있던 GM으로서는 에너지 절약형 차량 개발이라는 시대적 욕구를 무시할 수 없어 디젤 엔진 캐딜락을 만들었지만 미국인들은 미국 차의 상징인 캐딜락의 자존심과 전통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디젤엔진은 캐딜락에게 커다란 정체성 손실을 가져다 준 불명예였다.

 

옥에 티인 디젤엔진만 안 얹었더라면 80년대 세빌은 고전적인 우아함과 현대적인 기술을 조화시킨 자동차로 전 세계를위한 새로운 미국 자동차의 표준이 됐을것이다. 이 80년형 캐딜락 세빌은 미국 자동차 디자인계의 전설로 불리던 하리 얼(Harley Earl ; 1893-1969)의 수제자였던 빌 미첼(William Mitchell ; 1912 - 1988)의 마지막 디자인이었다. 이 차는 디지털 전자식 연료 분사 장치가 장착 된 6.0 리터 147마력 V8 가솔린 엔진을 장착하고 최고시속 178km를 냈다. 또 5.7리터 V8 106마력의 전자연료 분사장치가 장착 된 디젤엔진 세빌은 최고시속이 157km였으나 주로 캘리포니아에서 판매됐다.

 

◉ 1985년생 폭스바겐 비틀 (Volkswagen Beetle) - 나치에 묻혔던 반달형의 아름다움

 

폭스바겐 비틀(Volkswagen Beetle)은 반달형 둥근 생김새 때문에 ‘딱정벌레 차’ 또는 ‘버그 카(곤충형 ; bug car)'라고 불리는 불변 디자인으로 자동차 역사상 최장수, 최다 판매된 독일산 소형차이다. 타입 1인 초대 비틀은 1938년부터 2003년까지 생산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독일 나치 군용차로 부분 개조되어 생산 사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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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독일 국민차 개발 지시를 받아 20세기 독일 자동차 기술의 거목이었던 페르디난드 포르셰 박사가 설계한 승용차이다. 65년동안 총 2,100만대 남짓 셍산되어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 3위 안에 오를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1967년 8월 폭스바겐이 미국 시장으로 진출할 때 선전을 위해 비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공식 모델명이 되었다. 초대 비틀은 수평대향식 엔진이 뒤에 있었으며 후륜구동 방식(RR-Layout)을 적용하였다.

 

1930년대 독일의 지배자인 아돌프 히틀러는 국민차 계획을 세우고, 이를 공학박사 페르디난트 포르셰에게 개발하도록 지시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건을 달았다.1. 독일 제국 국민이 즐거움을 통한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성인 2명과 어린이 3명이 탈 수 있는 차를 만들 것.2. 시속 100 km로 아우토반을 달릴 수 있는 차일 것.3. 가격은 1,000 마르크로 저렴하고 튼튼한 차를 만들 것.4. 독일의 가혹한 겨울 환경을 고려하여 얼지 않는 차를 만들 것.당시 오토바이 한 대 제작비도 않되는 대당 1,000마르크라는 최악의 조건을 설계와 크기, 소재의 절감으로 완성된 최초의 비틀은 1938년에 국민차(KdF Wagen)라는 명칭을 달고 총통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정부의 지도자들에게 제공됐다. 히틀러는 KdF-Wagen에 흡족하여 자주 사열차로 이용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비틀은 흔히 악마(아돌프 히틀러)와 천재(페르디난트 포르셰)의 합작품이라고 불려 초기에는 이미지가 좋지 못했으나 미국에서 인기를 끌면서 공기저항 감소형 비틀 디자인과 실리성을 평가 받기 시작했다.

 

당시 근육질의 극치를 달리던 미국차에 비해 군더더기 없는 딱정 벌래 모양의 매끈한 스타일과 작고 경제적이어서 전후 막가파 젊은 미국집시들인 가난한 히피들의 상징으로 통했다. 원색적인 혼란한 페인팅을 한 비틀을 몰고 미국 전역을 누벼 폭스바겐은 큰 돈 않들이고 엄청난 선전 효과를 거두었다. 폭스바겐 비틀은 2003년 완전 단종때까지 수평대향 4기통, 1,000cc급(1,100∼1,600cc), 공랭식, 리어엔진 리아드라이브를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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