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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유쾌하게 은퇴한 F1 전설 카레이서

페이지 정보

글 : 김병헌(bhkim4330@hanmail.net)
승인 2019-12-31 21:37:17

본문

영국인 카레이서 제임스 헌트가 1976년 일본 후지 서킷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일본 그랑프리에서 인상적인 드라이브로 3위를 차지하며 잊지 못할 F1 챔피언십을 결정지은 지 43년이 흘렀다. 헌트는 몬트리올에서의 캐나다 그랑프리를 끝낸 뒤인 1993년 6월 첫 주에 세상을 떠났다. 심장마비로 45세의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는 항상 쾌활하고 명량한 외향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명백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복잡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즉 그의 경력을 기준으로 세 가지 성격이 있었다. 생기 넘치고 때론 사나우면서도 매력적인 떠오르는 F1 스타였으며 때론 시끄럽고 촌스러운 그랑프리의 에이스였다. 그리고 레이서를 은퇴하고서는 매우 여유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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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트가 정말 그런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 악수였다고 한다. 그와 악수한 사람들은 마치 손가락이 프레스에 눌려 금이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항상 신체적으로 적합하고 매 경기에서 선두를 달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포뮬러 포드와 F3 그리고 F2에서 보낸 시간 동안은 대부분 전기적 강도에 의해 특징이 나타났다.

 

그는 항상 빨랐지만 변덕스러운 성격을 억누르는 것이 필요했다. 1970년 브라밤 F3에서 그는 뛰어난 실력을 보여줬지만 불행한 드라이버로 비춰졌다. 아마도 헌트의 타고난 터프함이 불행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70년 루앙 국제 F2 레이스에서 프랑스의 차세대 스타 진 룩 살로몬즈의 마티니와 엉켰을 때 헌트는 F3의 선두 다툼을 벌이는 여러 대의 경쟁 속에 갇혔다. 헌트의 콕핏 윗부분이 뒤집혀서 살로몬의 차량을 덮은 정말 끔찍한 사고였다. 드라이버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같은 레이스 후반에 다른 프랑스의 유망주 데니스 데얀 역시 피트를 지나 높은 속도로 벗어나며 심한 추돌로 인해 사망했다. 이러한 상황은 헌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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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후 모스포트 파크에서 열린 캐나다 그랑프리에서 아이러니하게 두 번째 맥라렌 M26으로 조핸 마스가 랩타임 경신을 시도하는 동안 사고로 탈락하면서 마샬을 가격했다. 나중에 그는 1978년 독일 그랑프리 연습주행 동안 비트리오 브람빌라스 서티스를 호켄하임 서킷의 피트 벽으로 밀어 부쳤다. 그것이 그의 기질의 전부였다. 그러나 헌트는 곤란한 일에 부딪혀도 결코 불평하지 않았다. 

 

한편 헌트를 생각하면 자동적으로 2013년 개봉한 영화 <러시: 더 라이벌(Rush)>에 등장한 니키 라우다를 떠오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완전히 틀려보지만 그들은 F1으로 들어가는 기회를 움켜쥐려고 노력하는 야망 있고 젊고 유망한 레이서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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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다는 재정적인 지원으로 비교적 원활하게 레이스를 시작했다. 그는 1972년 워크스팀과 함께 F1과 F2 풀 시즌을 참가하기 위해 처음엔 오스트리안은행에서 그리고 다른 은행에서 1만 유로를 빌렸다. 반면 헌트는 뒷문으로 모터레이싱 바닥을 돌아다니고 있었고, 워크스팀 테이블에서 떨어지는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헤스켓이 F3에 데스틀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참여시키기로 결정했을 때다. 브라질에서 개최된 F2 토네이오 시리즈의 마지막 경기에 그의 이름을 크게 적은 마치 F2 섀시를 빌려 참가했다. 인상적인 경기를 펼친 헌트는 팀과 함께 F1으로 올라갔다.

 

알렉산더 헤스켓은 빌리 번터 레스큐를 해고한 뒤 새 매니저인 앤서니 호슬레이를 스카웃했다. 앤서니 호슬레이는 빈틈없이 헌트를 관리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헌트가 불안감을 폭발하면 그를 진정시키는데 탁월했다. 1973년 와트킨즈 글랜에서 열린 미국 그랑프리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는 레이스 시작이 가까울 때, 헌트는 앞을 주시하며 주의깊게 호슬레이의 말을 들었고, 호슬레이는 그런 헌트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헤스켄 마치731 옆에 쭈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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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트는 루니 피터슨의 로터스72 뒤를 이어 2위로 추격했다. F1에 온 이래로 최고의 성적이었다. 2년을 더 헤스켓에서 드라이빙한 후 헌트는 움직일 시간이 되었다. 그의 오너인 헤스켓은 돈을 다 써버렸고 헌트는 정평이 난 선두 팀에 있기를 원했다. 그 때 에머슨 피티팔디는 그의 동생 윌슨즈 코페르수카르-피티팔디 자리를 교체하는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렸고, 헌트는 비어있는 맥라렌 시트에 들어갔다. 그것은 적절히 들어맞았다. 

 

어찌 보면 헌트는 배신자였지만 팀 대표인 테디 마이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했다. 후에 부르스 맥라렌, 론 데니스, 테디 마이어 등은 다른 어떤 개인보다 더 맥라렌 전설에 공헌했다. 의욕적인 작은 남자 테디 마이너 대표는 1990년대 후반 유럽피언 자동차경주에선 아웃사이더가 되었었다. 모터스포츠 관계자들은 헌트와 같이 주인없는 송아지처럼 행동하기 원한다면 테디 마이어와 함께하는 것도 괜찮다고 한다.

 

한편 맥라렌은 1978년이 지나고 그라운드 이펙트 기술이 생기고 반응이 느렸다. 헌트는 이듬해 하베이 포스트레스와이트를 심난하게 한 볼프로 옮겼다. 헌트는 그만두기 전 79년 여름에 하베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헌트는 그의 차를 쓰레기처럼 만들어버리고 우발적인 태도 이상으로 크게 격노했다.

 

나중에 헌트는 레이싱 경력을 바탕으로 최고의 F1 방송 해설자가 되었다. 헌트는 현재 F1에서 절대 존재할 수 없는 돌진하고 눈부시고 버릇없는 1970년대 레이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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