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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오토뉴스 채영석 국장은 30년 동안 자동차 전문기자로 활동해 왔으며 인터내셔널 엔진 오브 더 이어, 월드 카 오브 더 이어의 심사위원이다. 골드만 삭스 등 투자은행들과 다른 시각으로 산업 분석을 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 3,000종 이상의 차를 타고 시승기를 쓰고 있으며 세계적인 모터쇼와 기술세미나 등에 참석해 글로벌 차원의 트렌드 분석에 힘을 쏟고 있다. 2013년 골드만 삭스가 유가 200달러 시대를 이야기했을 때 역으로 유가 폭락 가능성이 있다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5. 히틀러가 만든 정치적 산물, 아우토반과 폭스바겐 비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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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charleychae@global-autonews.com)
승인 2016-12-06 19:25:05

본문

라인강의 기적. 한강의 기적과 함께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표현이다. 그것은 강이 주는 여러 가지 혜택 때문일 것이다. 강과 하천은 인체의 혈관과 비교된다. 그 혈관을 통해 여러 가지 교역이 이루어지고 교류가 활발해져 경제가 발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도로는 신경망과 비교된다. 혈관을 통한 영양분의 공급만큼이나 정보의 소통 또한 중요한 과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단순한 물리적인 현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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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육상이든 해상이든 원활한 소통 여하에 따라 한 나라는 물론이고 그 지역 전체의 경제발전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 넓은 평원이 펼쳐진 프랑스와 독일 중심으로 한 서유럽은 외부 침입에 취약하다는 약점도 있었지만 평화 시에는 소통과 교류가 상대적으로 좋은 조건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아프리카를 보면 강이 바다로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도중에 낙차가 큰 경우가 많아 물자의 교류에 불리했다.

 

유럽은 일찍이 도로 건설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영국을 중심으로 근세를 주름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힘이 미국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프랑스나 영국과 달리 독일은 엔지니어링 부문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하며 공산품의 나라로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미국 패권이 주도하는 시대이지만 독일의 공업 기술은 여전히 세계를 호령하고 있다. 이 난을 통해 역사를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동차의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이슈로 분류될 수 있기 때문에 짚고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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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미국 GM의 파산 이후 연방 정부가 다시 살려낸 것이 보여 주듯이 자동차는 정치적인 바람을 많이 타는 제품이다. 최근 폭스바겐 디젤 게이트의 진행 상황을 보면 보이지 않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929년 경제 대공황을 전후 해 그런 현상은 두드러졌다. 우선 아돌프 히틀러에 의한 아우토반 건설과, 국민차 생산 계획이 대표적이다. 워낙에 자동차산업사상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에 그 정치적인 함의보다는 아우토반과 독일 국민차에 관한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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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에 국한하자면 독일의 자동차 기술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배경에는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 아우토반이 있다고 하는 데는 이의가 없다. 현재 아우토반의 총 연장 길이는 약 1만 2,950km다.

 

아우토반은 다른 나라의 고속도로와는 분명 다르다. 미국의 프리웨이는 지리적인 특성상 직선도로가 많고 산악도로보다는 평지를 달린다. 미국은 도로 정체가 심하면 카 풀을 이야기하기보다는 도로를 넓히는 데 힘을 쏟는다. 그래서 미국 전체 경작 면적의 10%가 도로다. 산이 많은 프랑스의 고속도로는 굴곡로가 많고 노폭도 다른 나라에 비해 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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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토반은 독일 국내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의 고속도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와 연결되고 있다. 스위스의 국경에는 아우토반에서 국경 검사소가 있는데, 스위스의 경우에 아우토반의 요금은 연간 통행요금을 지불해 받게 되는 스티커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통행이 이루어진다. 프랑스의 고속도로 오토루트는 유료 구간이 많아 국경을 넘게 되면 고속도로에 요금소가 나타나게 된다. 네덜란드의 고속도로는 무료이기 때문에 다만 국경을 나타내는 표지인 EU 표지만 있다. 오스트리아 쪽은 무심코 지나면 국경을 알 수 없다.

 

아우토반(AutoBahn)의 시작은 히틀러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929년부터다. '아우토반'은 '자동차가 달리는 길'이다. 그러니까 아우토반은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인 것이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우토반의 최초 구상과 계획, 그리고 부분적인 건설은 192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부터였다. 그러나 경제적 문제, 정치적인 혼돈 등으로 인해 베를린 주변을 제외한 계획의 대부분은 진행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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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독일에게 막대한 배상금이 청구되면서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세계 대공황으로 인한 불경기로 심각한 경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독일 국내에는 대량의 실업자가 생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치당을 통해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1933년 ‘이제 국력은 철도의 길이가 아닌 고속도로의 길이에 의해 평가 받는다’며 전 국토에 대규모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공공 사업을 통해 실업률을 잡겠다는 것이었다.

 

히틀러의 의중은 맞아 떨어져 공공 사업 덕분에 독일에서는 실업자가 큰 폭으로 감소했다. 결과적으로 아우토반 계획은 선전에 이용되었다. 아우토반의 건설은 '새로운 독일의 건설'을 요구하는 나치당에도 적합한 계획이었으며, 또한 공황으로 심각한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던 독일 국민 의식 고양에도 크게 기여했다. 아우토반은 활주로로도 이용되게 건설되었다는 것에서 히틀러의 사고가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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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토반은 세계 최초의 본격적인 고속도로 네트워크였다. 단순히 물류를 원활하게 하는 도로의 역할 외에도 아우토반은 독일을 세계 굴지의 자동차 대국으로 만들어내는 데 큰 주춧돌이 되었다. 프랑크푸르트로부터 다름슈타트까지의 최초의 구간은 1935년에 개통했다. 이 구간은 1938년까지 메르세데스 벤츠 등에 의해 최고속도 기록 달성을 위해 사용되기도 했었다.

 

이때부터 독일차들의 속도 경쟁을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참고로 현재까지 아우토반에서 기록한 최고속도는 1938년 1월 8일 메르세데스 벤츠의 그랑프리 레이싱카 W125로 루돌프 카라치올라가 기록한 268.9mph/(434.2km/h)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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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아우토반은 곡선을 이용한 완만한 커브의 라인 설정이나, 근대적이지만 풍치에 맞은 교량, 고가다리 디자인을 받아들여 기존의 자연 경관과 조화되는 도로 건설을 목표로 했다. 거시적인 견지에서 고속도로를 설계하는 그 컨셉은 전후에도 아우토반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많은 고속도로에 적용됐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연합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터널이나 가까운 숲 안에 항공기를 숨기는 역할을 했다. 또한 아우토반을 활주로로 대신 이용하기도 했다. 연합군의 폭격에 의해 아우토반은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지만 전후 서독 지역은 빠른 시간 안에 수복했다. 1950년대 서독 정부는 아우토반 구축 프로그램을 전개해 신구간 건설 및 기존 구간 개량에 많은 부분을 투자했다. 동독 및 폴란드 구간은 정부의 경제적인 문제로 수복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독일 재통일 후에는 예산을 주로 구 동독 쪽에 투자해 구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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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아우토반은 속도 제한 구간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남부 유럽, 특히 시내를 관통하는 뮌헨 주변과 프랑크푸르트 주변의 아우토반은 출퇴근 시간의 정체로 악명 높다. 주말에는 남부 해변으로 가기 위해 트레일러를 매단 차들이 우리나라의 추석을 방불케 하는 행렬을 보인다. 북부 독일 지역의 아우토반은 속도 무제한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 많다.

 

예전에는 아우토반을 통행하는 자동차 전체가 무료였다. 하지만 동서 냉전의 종결, EU에 의한 유럽 경제 통합으로 인해 유럽 중간에 위치하는 독일의 아우토반은 각국에서 유입되는 교통량 증가와 주변 환경 대책, 도로 정비 유지 등으로 인해 막대한 비용이 늘어나고 있어 독일 정부는 유료화를 적극 검토하기도 했다. 2005년 1월부터 12톤 이상의 대형 트럭은 유료로 전환되었다. 다만, 요금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GPS와 휴대 전화를 통한 요금 부과 방법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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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 구역(휴게소)와 주차구역 등의 시설은 잘 정비되어 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화려하고 큰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이 졸음 휴게소보다 조금 더 큰 정도다. 화장실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휴게소 내에서 음식을 사먹는 사람보다는 야외에서 가져 온 음식을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의 경부고속도로도 아우토반을 본 떠 건설됐는데, 1964년 12월 박정희 전 대통령은 서독 방문길에 본~쾰른간 20㎞ 구간을 시속 160㎞로 달려본 뒤 이에 혹해 경부고속도로의 모델로 삼았다. 경부 고속도로 역시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건설이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는 평가를 후세에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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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토반과 함께 히틀러의 공으로 여겨지고 있는 또 하나 핫 이슈가 국민차였다. 히틀러는 1934년 자동차가 귀족들만의 독점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일반인들도 탈 수 있는 국민차 생산을 추진했다. 당연히 독일 국민들로부터 인기를 얻기 위한 전략적 차원이었다. 1933년 3월 아돌프 히틀러와 페르디난트 포르쉐박사가 만났다. 이 극적인 만남을 후세에서는 흔히들 ‘천재와 악마의 악수였다’고 평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히틀러는 그의 국민차 계획을 포르쉐박사에게 들려주고 설계를 부탁했다.

 

히틀러가 생각하는 독일 민족을 위한 국민의 차는 경제적인 소형차로서 실내가 넓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고속도 100km/h로 달릴 수 있어야 하고 기름1리터로12km이상 달릴 수 있어야 하며 차의 정비가 쉽고 관리비용이 매우 적게 드는 차라야 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자동차의 엔진이 얼지 않는 차를 주문했다. 왜냐하면 독일의 겨울은 매우 추운데다가 국민 대다수가 차고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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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차는 네 사람이 탈 수 있어야 하며 1,000마르크 이상 지불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조건이었다. 1,000마르크라는 액수는 당시 미국 돈으로 계산하면 250달러에 해당되는 액수였다. 그 당시 아무리 싼 승용차라도 400달러 이하로는 만들 수 없었다. 오토바이 값 정도의 자동차를 만들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포르쉐박사는 독일 최고 권력자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3년의 연구 시험 끝에 공기 저항을 줄일 수 있는 방개 모양의 디자인에 냉각수가 필요 없는 공냉식 휘발유 절약형의 소형 엔진을 차체 뒤쪽에 얹은 '폭스바겐 비틀' 시작차 6대를 만들어 히틀러에게 바쳐 만족한 찬사를 받았다.

 

히틀러는 이 차를 다시 메르세데스 벤츠에 50대를 시험 생산케 해 총 주행거리 250만km의 시험 주행을 하게 했다. 이 차는 1938년 폭스바겐 38이라는 이름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에 대해 히틀러는 ‘강함과 기쁨의 차’ 저축 운동을 통해 모든 노동자들도 자동차를 소유하게 하겠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전후에 다시 부활해 비틀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났다. 재미있는 것은 그 비틀은 작은 차체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는 물론이고 미국시장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 폭스바겐 비틀은 제 2차 대전 전에 개발되어 전쟁이 끝나고부터 생산되어 1978년 단종될 때까지 무려 2,100만대라는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어쨌거나 이런 자동차 파시즘은 나중에 언급할 모터스포츠와 대량생산 시대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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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자동차를 이야기할 때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뉘르부르크링 서키트다. 현대자동차가 2013년에 테스트센터를 설립하면서 한국에서도 더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극한 테스트코스로 유명한 곳이다.

 

뉘르부르크링(Nürburgring)은 독일의 중서부 뉘르부르크(Nürburg)에 있는 장거리 서키트다. 흔히 '모터레이싱의 성지'라 불린다. 뉘르부르크링의 시작은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3년에 창립된 유럽 최대 규모의 자동차 클럽 ADAC(Allgemeiner Deutscher Automobil-Club e.V.)는  아이펠레넨(Eifelrennen)이라는 경주를 열고 있었다. 아이펠레넨은 뉘르부르크 근방에 위치한 아이펠 산맥의 공공도로를 달리는 경주였다. 하지만 아이펠 산맥의 험난한 지형으로 전용 서킷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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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필요성과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의 실업자 구제사업이 맞물려 뉘르부르크링 건설이 시작되었다. 역시 정치적인 이유가 개입됐다. 공사는 1925년부터 2년동안 진행되었으며, 총 길이는 28.3km에 달했다. 이 서키트는 고저차가 크고 노폭이 좁은데다 수많은 코너가 있어 과거부터 많은 사고가 있었다. 안전을 위해 트랙은 지속적으로 변형되어, 지금은 과거에 비해 5~6 km 정도 짧은 길이가 되었다. 현재는 포뮬러 원 독일 그랑프리, 유럽 그랑프리, 슈퍼바이크 월드 챔피언십 같은 유명 국제 대회부터 뉘르부르크링 24시, 뉘르부르크링 1000km와 같은 대회가 열리고 있다. 경기가 없는 날에는 일반인에게 서킷을 개방하고 있다.

 

누구라도 경쾌하게 달릴 수 있는 것이 가능한 뉘르부르크링이 존재한다는 것은 독일인을 물론이고 카 마니아들에게는 꼭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주행성능이 세일즈 포인트인 자동차회사로서는 그런 뉘르부르크링을 확실하게 달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이 가혹한 뉘르부르크링를 제패하는 것이 가능하면 엔진, 서스펜션, 차체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어 어떤 도로에서도 견디어 낼 수 있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포츠카 메이커인 포르쉐와 ‘달리는 즐거움’을 브랜드 슬로건으로 하고 있는 BMW가 오래 전부터 뉘르부르크링에서 주행 테스트를 한 것은 그런 배경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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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구테스트만이 아니라 핸들링 테스트의 무대의 하나로서도 뉘르부르크링을 이용한다. 뉘르부르크링을 달릴 수 있는 자동차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뉘르부르크링도 달릴 수 있는 자동차를 만드는 것이다. 50km/h로 달리는 일반도로의 승차감과 핸들링, 아우토반에서의 안정성, 그리고 뉘르부르크링에서도 문제없이 달릴 수 있는 엔진과 하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또 뉘르부르크링에는 마찰력이 낮은 곳이 많아 조금만 비가와도 눈길처럼 미끄러지기 쉬운 코너가 있다. 다른 서키트라면 타이어의 그립으로 어떻게 해결이 되겠지만 뉘르부르크링은 타이어의 접지력에만 의존해서는 잘 달릴 수 없다는 것을 통감하게 된다. 자동차 그 자체의 성능을 향상시키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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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유로를 내면 누구나 1주를 할 수 있는 ‘퍼블릭 주행’에 대해 자동차회사들이 사용하는 주행시간은 통칭 ‘인더스트리’라고 불린다. 퍼블릭 주행에는 독일만이 아닌 유럽 각지의 번호판을 부착한 자동차들은 많이 볼 수 있다. 한번쯤은 달려보고 싶다고 관광기분으로 온 사람들도 많지만 뉘르부르크링을 달리기 위해 자동차를 특별히 개조해 도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자동차 메이커와 타이어 메이커가 여기에서 테스트 하는 이유는 자동차와 타이어에 아주 엄격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독일 자동차회사들은 오래 전부터 뉘르부르크링을 내구 테스트의 일환으로 사용해 왔다. 이곳을 달리는 것은 자동차에 대한 부하가 일반도로의 주행시의 10배에 달한다고 할 수 있다. 200km/h를 넘는 속도로 코너링 중에 갑자기 튀어 오르는 듯한 곳이 여러 군데 있다. 차체 하부는 물론이고 차체 전체에 걸리는 스트레스는 상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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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명성 때문에 GM이 ‘캐딜락 르네상스’의 기치를 내 걸고 개발한 CTS의 주행 테스트를 뉘르부르크링 서키트에서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렉서스의 IS도 스포츠 세단으로서의 이미지 강화를 위해 이곳에서 테스트를 했고 현대자동차도 테스트 센터를 설립해 주행성 연마에 공을 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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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가정은 의미가 없다고 한다. 히틀러는 자신의 정권을 위해 고속도로를 건설하게 하고 국민차를 계획했다. 순수한 의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자동차회사들도 동원해 부역하게 했다. 예를 들어 BMW도 2차 대전 당시 나치 정권에 협력했었다. 그러나 BMW는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회피하지 않았다. 당시 BMW 사장 군터 콴트는 나치 정권에 협력해 병기, 대포, 탄약, U보트 배터리 등 다양한 군수물품을 생산했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 중 5만명을 골라 공장에서 강제노동을 시키기도 했다. 이에 대해 BMW는 극심한 고통을 주었던 것이 대해 깊은 후회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어디 BMW 뿐이겠는가. 모든 자동차회사들은 전쟁이 발발하면 군수용 운송수단 생산에 동원되어야만 했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과정을 통해 비행기와 선박 등의 피드백을 통해 자동차 기술도 발전됐다.

 

결과론적인 시각이기는 하지만 히틀러가 아니었다면 오늘날 독일산 자동차가 이처럼 성능 면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또한 오늘날처럼 자동차 기술에서 세계를 리드하는 입장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독일은 지금까지도 나치에 부역한 사람들을 찾아내 단죄하고 있다. 지나간 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잘잘못을 정확히 따지고 잘못된 것은 철저히 반성하는 자세를 보여 주고 있다. 결국은 그런 과정이 지금에 와서는 German Engineering 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독일이라는 나라의 브랜드로 이어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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