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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 수퍼커브 스토리 – (3) 3만대는 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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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유일한(chepa@global-autonews.com)
승인 2017-10-11 23:4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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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커브 제작에는 새로운 디자인뿐 아니라 신소재도 적용되었다. 프론트 카울과 레그 실드를 구성하는 부품을 그 당시에 자주 사용되고 있던 FRP 수지 대신 폴리에틸렌 수지를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기존 FRP 수지에 비해서 경량화를 실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깨지기 쉬운 FRP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연질 재질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쉽게 깨지지도 않았다. 또한 차체에 따뜻함을 부여하는 것도 상대적으로 쉬워졌다.

 

키무라는 폴리에틸렌 수지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색상 선택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수퍼커브가 대중적인 모터사이클을 지향하는 이상 정교해 보이는 색상보다는 친근한 인상의 색상을 사용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바다와 하늘에서 항상 보기 때문에 친근하게 느끼는 색상인 하늘색이 수퍼커브 모델의 대표 색상으로 선정됐다.

 

차체 색상과 대비되는 인상을 갖게 하기 위해 시트는 붉은색을 기본으로 하게 되었다. 당시 소이치로는 붉은색의 셔츠를 자주 입었고, 레드 색상의 스포츠카를 몰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힌트를 얻어 붉은색을 적용했다. 한편으로는 포인트를 주기 위해 노력하던 중 키무라는 캐서린 햅번 주연의 ‘서머타임’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고, 영화 속에서 보라색의 유리가 붉게 빛나는 장면을 보게 된 후 이에 영감을 얻어 ‘퍼플레드’ 색상을 시트에 적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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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는데, 당시 폴리에틸렌 수지를 이 정도로 크게 성형할 수 있는 업체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협상 결과 혼다에서 금형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한 업체에서 제작 외주를 받아주게 되었다. 본래대로라면 매섭게 돌아서도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소이치로와 키무라, 그리고 수퍼커브를 같이 제작하는 직원들의 열기가 전해진 것인지 외주 제작 업체들도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된 것이다.

 

당시 소이치로는 직원들은 물론 협력 업체에도 ‘정말 잘 생각해 주십시오’, ‘수퍼 커브는 모두가 힘을 모아서 만드는 모터사이클입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소이치로 뿐 아니라 직원들도 그런 마음으로 일해서인지 아무리 힘들고 귀찮은 부탁을 해도 싫어하는 얼굴을 보기는 힘들었다고 한다. 특히 키무라는 협력 업체를 자주 다녔던 탓에 ‘연구 개발 만으로는 좋은 물품을 제작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우치게 되었다.

 

수퍼커브의 등장 그리고 3만대
골격과 외형이 완성되었으니 이제 중요한 것은 이름이었다. 이 때까지도 사실 커브라는 이름은 있었지만 수퍼커브라고 불리지는 않았다. 당시 혼다의 조형실에는 커브 F의 엠블럼이 잔뜩 있었는데, 키무라는 이를 이용해보고자 했다. 지금은 그 울림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당시 수퍼(Super)라는 이름은 신선하다는 느낌이 있었기에, 단순하게 생각해 ‘수퍼커브’라고 짓고 엠블럼의 스케치를 그려서 소이치로에게 보여줬다. 소이치로는 “우와 이거다!”라고 외쳤고,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이 새로운 모터사이클의 이름은 ‘수퍼커브’로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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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957년의 12월 말이 다가올 때 즈음에 수퍼커브의 양산 버전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사내 식당에 베니어 합판을 깐 후 그 위에 양산 버전이 전시되었고, 이를 본 후지사와 전무는 감탄을 연발했다. 그리고 “이거라면 3만대는 팔 수 있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일본 내 모터사이클 판매량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니었기에 소이치로를 비롯한 모든 직원이 ‘연간 3만대’라고 생각했었고, 이것만으로도 약간의 소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후지사와 전무의 다음 발언은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아니, 연간 3만대가 아니라고. 월 3만대는 팔 수 있단 말이다!”

 

당시 그 발언을 들은 혼다의 직원들은 모두 놀랐지만, 실제로 수퍼커브가 판매되기 시작하면서 그의 발언은 현실이 되기 시작했다. 아니 이제는 더 많이 판매되고 있으니 발언을 초월한 판매량이 나오고 있다고 해도 될 것이다. 후지사와 전무는 자신의 말을 실현하기 위해 치밀한 홍보 전략을 펼쳤는데, 이와 관련된 이야기 역시 계속 기술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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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무라는 혼다의 제품들, 특히 수퍼커브 개발에 있어서 소이치로의 독려를 기억하고 있다. “오얏상은 경영자이기도 했지만, 직원들에게 항상 ‘너희들은 비용에 연연하지 말아라’라고 했습니다. 개발 비용은 생산을 통해 만회할 수 있다고 하면서요. 그렇게까지 말하시니 마치 큰 배를 타고 항해를 나가는 기분으로 철저하게 모든 일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경영자로써 그런 마음가짐은 굉장했던 겁니다.”

 

1958년 8월, 혼다 수퍼커브가 드디어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본격적인 수퍼커브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4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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